거짓말 고백한 네오프톨레모스, 대의와 양심 사이서 흔들리다

입력 2019-04-12 17:14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48) 연민(憐憫)



인간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양심(良心)이다. 양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 소리에 복종하려는 마음이다. 자신을 탁월하고 독창적으로 만드는 양심을 신은 누구에게나 선물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타인들이 추종하는 부나 권력, 혹은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제로섬 경쟁에 뛰어든다. 타인들도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략을 짜고 경쟁한다. 이 경쟁에서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승리하는 게 최상의 전략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그런 재화가 아니라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독창적인 재화’를 발굴한다. 그 재화는 은행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다. 양심은 그것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슬그머니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심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기품이 있으며 동시에 겸손하다.

연민은 양심에서 발견되는 최상의 보물이다. 동물인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가치가 연민(憐憫)이다. 유인원들과 별 차이 없었던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 더 나아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됐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는 유인원’이 아니라 ‘알아야 할 것이 한없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유인원’이란 의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와 유전자와 겉모습은 같지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다른 인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정기적으로 동굴로 내려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묵상하고, 타인과 동물들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며 5만 년 전부터 동굴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른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연민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연민이 없다면 인간은 생각이 전혀 다른 인간들과 모여 가족, 친족, 마을, 더 나아가 도시라는 공동체를 구축할 수 없다. 연민은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끈’이다.

열정(熱情)

연민은 자신을 찾아온 당장의 이익을 거절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다. 평범한 인간을 뛰어난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마음가짐은 열정(熱情)이다. 열정은 그 개인의 혼백을 작동시켜 그(녀)에게 어울리고 재미있는 일에 몰입시킨다. 그는 열정으로 무장한 집중을 통해 남들이 상상할 수 없고 본 적도 없는 독창적인 것을 발견한다. 그는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진입하기 위해 공포, 소외, 그리고 실패라는 경계를 통과해야 한다. 이 경계가 바로 고통(苦痛)이다. 열정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패션(passion)은 ‘거침없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통을 당하다’라는 라틴어 동사 파티오르(patior)에서 유래했다. 열정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려는 두려움과 용기의 산물로, 그 과정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연민은 자신의 삶을 심오하게 살려고 연습하는 자들이 그 고통을 일정하게 감수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는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감지하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고통은 남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다. 연민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컴패션(compassion)엔 ‘고통’이란 단어 ‘패션’이 있다. 컴패션은 타인의 고통(passion)을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com) 감수하려는 의지다. 인간만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TV를 통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양심 고백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오디세우스,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의 사주를 받아 필록테테스의 활과 화살을 훔치러 외딴 섬 렘노스에 왔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이 그 섬에 온 원래 이유를 숨기고 필록테테스의 연민을 얻기 위해 거짓말로 안심시킨다. 그는 아버지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가로챈 오디세우스를 원수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필록테테스는 오디세우스로부터 버림받고 독사에 물린 채 이 외딴 섬에 방치됐기 때문에 네오프톨레모스와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이제 그들은 오디세우스를 피해 새로운 곳으로 항해할 것이다. 필록테테스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거주하던 동굴로 돌아가 물건들을 챙기다 뱀에 물린 상처로 인해 발작을 일으켜 기절한다.

필록테테스는 한참 만에 깨어난다. 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네오프톨레모스를 보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젊은이여! 사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옆에서 나를 돕고자 연민의 마음으로 내 고통이 가라앉기를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니!”(869~871행) 소포클레스는 ‘엘레이오스’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해 연민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비극과 예술에 관한 핵심을 기술한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은 관객들에게 ‘공포와 연민’이란 감정을 선사한다고 기술한다. ‘공포’는 주인공이 당하는 형용할 수 없는 불행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관객이 하나가 돼 느끼는 감정이 연민이다. 필록테테스는 “그런 연민의 감정을 지니는 자만이 고귀하다”고 말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을 신뢰하고 따르려는 필록테테스를 불쌍히 여겨 자신이 온 이유를 고백한다. “사람은 제 본성을 버리고 본성에 맞지 않은 짓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견디기 어렵습니다.”(902~903행) 그런 후 자신이 온 목적을 말한다. “저는 이런 이유로 이 섬에 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배를 타고 트로이로 갈 것입니다. 당신은 아카이오리족(그리스인들)과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군대로 가야 합니다.”(915~916행) 이 말을 듣자 필록테테스는 배신을 당했다고 외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를 불행에서 건져 낼 구원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파멸자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의 생명과 같은 활을 다시 돌려달라고 호통친다. 그러자 네오프톨레모스는 대의명분이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단호하게 답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의무와 공익이 나를 윗사람들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들었습니다.”(925~926행)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 주어진 자신의 의무와 공익이다. 양심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필록테테스는 친구에서 괴물로 변한 네오프톨레모스를 ‘비열함이 만든 가장 가증스러운 걸작품’이라고 욕하며 비참하게 속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활을 빼앗긴 그는 이제 짐승이나 새를 잡을 수 없다. 외딴 섬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오디세우스의 등장

네오프톨레모스는 간절하게 활을 돌려달라는 필록테테스의 말에 흔들린다. 마음속 양심을 흔들어 연민의 정이 생긴다. 그가 고민하던 차에, 사리와 이익에 밝은 오디세우스가 갑자기 등장한다. 그는 활과 함께 네오프톨레모스를 트로이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트로이의 왕자이며 예언자인 헬레노스가 오래전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필록테테스와 그의 활이 필요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승리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계략인 사실을 깨닫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 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붙잡고 전형적인 리더처럼 말한다. “나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최선을 결정하는 요소는 상황이다. 오디세우스는 필록테테스의 강렬한 저항을 보고 판단한다. “우리에게는 그대가 더 이상 필요 없소. 명궁 테우크로스가 우리 곁에 있고, 나도 있소. 활을 다루고 손으로 겨누는 데에는 나도 그대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오.”(1057~1059행)

필록테테스는 이제 홀로 동굴에 남겨질 처지가 됐다. 그는 자신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던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매달린다. “아킬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로 내게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이대로 떠날 참인가?” 그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부하들에게도 간청한다. “친구들이여! 그대들도 나를 혼자 내버려둘 텐가? 그대들도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요?”(1070~1071행) 네오프톨레모스는 갈등한다. 이 불쌍한 필록테테스를 위해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의 부하들을 남겨두어 그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필록테테스의 활을 쥐고 오디세우스와 항구로 내려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는 필록테테스를 버려두고 매정하게 갈 것인가?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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